꿈은 소원을 왜곡시킨다
꿈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겉으로 드러난 ‘꿈내용’이 있고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은폐된 ‘꿈사고’가 있다. 전문어로는 각각 ‘외현몽’과 ‘잠재몽’이라고 한다. 꿈사고는 본심이지만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꿈내용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서만 우리는 꿈사고에 도달할 수 있다.
꿈은 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됐을까? 우리 마음 속에서 서로 상반된 두 개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소원을 성취하려는 힘이 있고 또 한쪽에는 그것을 누르려는 힘이 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관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된다. 관리가 진실을 솔직하게 밝히면 권력자는 관리의 발언을 억압할 것이다. 관리는 검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연히 자신의 생각을 완화하고 왜곡한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암시와 위장과 은폐에 의존해야 한다. 검열이 엄격할수록 위장의 범위는 넓어지고 원래 말하려는 의미를 종잡기 어렵게 된다. 꿈은 두 힘의 타협의 산물이다. 자신을 위장해 검열을 통과한 꿈사고만이 꿈내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여기서 실제로 내가 꾼 간단한 꿈의 일부를 소개한다. ‘...친구 R이 내 삼촌이다. 나는 그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내 환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그 배후에 뭔가 불쾌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내적 저항을 극복하고 분석을 시도했다. 내 삼촌은 중죄를 저질러 징역을 산 일이 있다. 아버지는 삼촌이 사람은 착하지만 생각이 모자란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친구 R이 삼촌이라면 나는 R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R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나는 왜 R과 삼촌을 연관지었을까? 그때 며칠 전 다른 친구 N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R도 N도 나도 교수 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친구였지만 경쟁자였다. N은 나에게 자신의 교수 임용이 자꾸 지연되는 이유를 알아보니 예전에 어떤 여자한테 억울하게 고발당한 일 때문이었다며 나한테는 아무 문제 없으니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꿈을 이해할 수 있었다. R과 N의 교수 임용이 지연되는 것이 유대계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나 역시 유대인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라면 나는 괜찮다. 꿈 속에서 삼촌은 내 두 친구를 하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나는 범죄자로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세 사람의 유대인이라는 공통성이 소멸되고 나는 안심하고 교수 임용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는 왜 애정을 느꼈을까? 나는 삼촌에게 한 번도 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한편 R을 좋아하긴 하지만 꿈 속의 애정은 분명 과장돼 있다.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꿈 속에서 내가 느낀 애정은 꿈사고를 은페하는 구실을 한다. 꿈해석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내 꿈사고는 R을 어리석다고 비방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애정이 이입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불쾌한 꿈들이 모두 소원 성취라는 사실도 이런 이중 구조를 통해 명쾌히 설명된다. 많은 환자들이 자 이래도 꿈이 소원 성취라고 우기겠느냐면서 나에게 들려준 꿈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마다 패소하는 꿈을 꾸는 변호사, 시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꿈을 꾸는 며느리의 꿈에서 나는 내 말이 틀리기를 원하는 그들의 강한 소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그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꿈이 소원 성취라는 말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사람은 부모나 형제가 죽어서 슬퍼하는 꿈을 꾼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로 가족의 죽음을 바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소원은 반드시 그 사람이 지금 품은 소원이 아니어도 된다. 어린 시절에 적어도 한 번은 품었던 소원이기만 하면 된다. 소원은 망각될 수는 있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이 죽으면 상심할 사람이 옛날에 나쁜 소원을 품었던 적이 있으면 이 소원이 꿈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은 대체로 화기애애하게 지낸다고 믿는다. 정말 그런가? 아이는 동생이 태어나면 십중팔구 질투한다. 아이는 이기적이다. 새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예상되는 불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안다.
부모의 경우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가 죽는 꿈을 꿀 때는 대개 자기와 성이 같은 쪽이 죽는 꿈을 꾼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는 꿈을 꾸고 딸은 엄마가 죽는 꿈을 꾼다. 이것은 어린 시절 경쟁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불가피한 운명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모든 남자아이가 한번쯤 꿈꿔본 모습이다. 반면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끌리며 엄마를 경쟁자로 여긴다.
혈연이 죽는 꿈은 어떻게 검열을 피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부모가 죽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보기 때문에 아예 검열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의 법에 아버지 살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어서 고려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것이다. 둘째 낮에 소중한 사람을 염려했을 수 있다. 이 염려는 앞서 말한 소원을 등에 업고 꿈에 들어오며, 한편 소원은 염려 뒤로 모습을 감추고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낮에 걱정을 했기 때문에 그 걱정의 연장선에서 밤에도 꿈을 꾼 거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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